고생이 많으셨던 우리 큰형수님!!!

본문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인생의 여정길을 걸어가다 보면, 오늘보다 더 좋은 날을 향하여 그리고 오늘보다 더 잘 살아가기 위해 열심을 다 해 노력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세상은 자기 자신이 생각했었던 바램처럼 움직여줄 때도 있겠지만, 그와 정 반대되는 인생의 여정길이 펼쳐질 때가 얼마나 많은가?.
사랑하고 존경드리며 그리운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충청남도 아산과 천안에서 태어나, 일제의 36년이라는 모진 핍박속에서 서로 만나 백년가약을 맺고 살아 오시면서 유영선 형님을 낳으시고, 그 후 국가의 부름을 받고 1사단 14연대 소속 국군으로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에 위치한 부대에서 복무 중, 1950년 북한 공산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3년 2개월간 처절한 전쟁에 참여하여,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위기를 격으면서 낙동강 전투, 평양 탈환, 그리고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격하며 혁혁한 공을 세우셨으며, 전쟁 중 후두부 파편상을 입으셨지만 기적적으로 살아 나셔서, 대구 야전병원으로 이송이 되셨으며 치료 후 제대를 마치시고, 척박하고 어렵게 살아가던 그 시절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면서도, 영남, 영열, 영숙, 영옥, 영규, 충식, 동식 모두 8남매를 낳으시고 길러 주셨다.
유영선 형님께서도 일찍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군대에 입대 하시게 되었으며, 미군의 주도하에 치러지는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되는 남쪽나라 십자성의 월남 전쟁에 맹호부대 소속 국군으로 참여하여, 고국을 그리면서 1년여 동안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선에서, 당시 몸에 해로운지 조차 몰랐던 고엽제속에서 근무를 해야만 했으며, 귀국 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나신 홍도화 큰형수님을 만나 충청남도 천안시 (천원군) 풍세면 용정리 하도부락에 위치한 집에서, 백년가약을 맺으시고 인생의 새 출발을 하시게 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중심부 남산 자락에 위치한 해방촌에서 서울 생활을 하시게 되었으며, 해외 건설현장을 넘나들며 병애, 병록, 병구, 병림 조카를 낳으시고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고자 노력 하셨으며, 1983년 해외근로자 생활을 꿈꾸던 나에게 해외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셔서, 내가 대우건설 소속 해외건설 근로자 신분으로 광활한 사하라 사막이 위치한 북아프리카 리비아에서 근무 중. 항상 근면성실하게 살아오신 큰형님께서는 1989년 무서운 고엽제의 휴유증 등으로 얻는 지병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많지 않은 연세에 멀고 먼 여행을 떠나셨다.
일찍 세상을 떠나신 형님을 대신하여 큰형수님께서는 네 명의 조카들을 부양하시며, 치열하고 삭막한 서울에서 살아 가시기에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조카들은 잘 성장을 하였으며, 각자 결혼을 하여 자녀들을 낳게되어 이제는 가족들이 많이 번성 하였다.
그러나 항상 잔병으로 살아오신 큰형수님께서는 73세의 일기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한마디 작별 인사도 없이 멀고 먼 여행길을 떠나시고 말았다.
우리 가족들은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형수님의 장례절차를 지켜보며, 큰형님과 큰형수님께서 못다이루신 꿈을 조카들이 이어 나가기를 기원을 드렸다.
장례를 마친 후 큰형님과 큰형수님께서 생활을 하셨던 해방촌을 가게 되었는데, 큰형님과 큰형수님을 추억하며 해방촌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평생 고생이 많으셨던 큰형님과 큰형수님께서, 이제는 영원의 세계에서 행복한 여행을 즐기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린다.
큰형님과 큰형수님!!!
그동안 감사 했습니다. 그리고 그림습니다. 그리고 평생동안 추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기 자신이 생각했었던 바램처럼 움직여줄 때도 있겠지만, 그와 정 반대되는 인생의 여정길이 펼쳐질 때가 얼마나 많은가?.
사랑하고 존경드리며 그리운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충청남도 아산과 천안에서 태어나, 일제의 36년이라는 모진 핍박속에서 서로 만나 백년가약을 맺고 살아 오시면서 유영선 형님을 낳으시고, 그 후 국가의 부름을 받고 1사단 14연대 소속 국군으로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에 위치한 부대에서 복무 중, 1950년 북한 공산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3년 2개월간 처절한 전쟁에 참여하여,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위기를 격으면서 낙동강 전투, 평양 탈환, 그리고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격하며 혁혁한 공을 세우셨으며, 전쟁 중 후두부 파편상을 입으셨지만 기적적으로 살아 나셔서, 대구 야전병원으로 이송이 되셨으며 치료 후 제대를 마치시고, 척박하고 어렵게 살아가던 그 시절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면서도, 영남, 영열, 영숙, 영옥, 영규, 충식, 동식 모두 8남매를 낳으시고 길러 주셨다.
유영선 형님께서도 일찍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군대에 입대 하시게 되었으며, 미군의 주도하에 치러지는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되는 남쪽나라 십자성의 월남 전쟁에 맹호부대 소속 국군으로 참여하여, 고국을 그리면서 1년여 동안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선에서, 당시 몸에 해로운지 조차 몰랐던 고엽제속에서 근무를 해야만 했으며, 귀국 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나신 홍도화 큰형수님을 만나 충청남도 천안시 (천원군) 풍세면 용정리 하도부락에 위치한 집에서, 백년가약을 맺으시고 인생의 새 출발을 하시게 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중심부 남산 자락에 위치한 해방촌에서 서울 생활을 하시게 되었으며, 해외 건설현장을 넘나들며 병애, 병록, 병구, 병림 조카를 낳으시고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고자 노력 하셨으며, 1983년 해외근로자 생활을 꿈꾸던 나에게 해외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셔서, 내가 대우건설 소속 해외건설 근로자 신분으로 광활한 사하라 사막이 위치한 북아프리카 리비아에서 근무 중. 항상 근면성실하게 살아오신 큰형님께서는 1989년 무서운 고엽제의 휴유증 등으로 얻는 지병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많지 않은 연세에 멀고 먼 여행을 떠나셨다.
일찍 세상을 떠나신 형님을 대신하여 큰형수님께서는 네 명의 조카들을 부양하시며, 치열하고 삭막한 서울에서 살아 가시기에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조카들은 잘 성장을 하였으며, 각자 결혼을 하여 자녀들을 낳게되어 이제는 가족들이 많이 번성 하였다.
그러나 항상 잔병으로 살아오신 큰형수님께서는 73세의 일기로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한마디 작별 인사도 없이 멀고 먼 여행길을 떠나시고 말았다.
우리 가족들은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형수님의 장례절차를 지켜보며, 큰형님과 큰형수님께서 못다이루신 꿈을 조카들이 이어 나가기를 기원을 드렸다.
장례를 마친 후 큰형님과 큰형수님께서 생활을 하셨던 해방촌을 가게 되었는데, 큰형님과 큰형수님을 추억하며 해방촌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평생 고생이 많으셨던 큰형님과 큰형수님께서, 이제는 영원의 세계에서 행복한 여행을 즐기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린다.
큰형님과 큰형수님!!!
그동안 감사 했습니다. 그리고 그림습니다. 그리고 평생동안 추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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